
지난달 14일 현대자동차의 프리미엄 브랜드 제네시스가 부산 동래구청에서 급발진 의심 사고를 냈다. 차량이 운전자의 의도와 다르게 제어되는 급발진 의심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운전자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
교통안전공단에 따르면 2010년 이후 올해 7월 말까지 국내 급발진 의심 차량으로 신고된 차량 총 482대 가운데 210건(43.6%)이 현대자동차가 출고한 것으로 드러났다. 다음은 역시 현대자동차 그룹 계열사인 기아자동차 제조차량이 78건(16.2%)으로 2위를 기록했고 르노삼성차가 17건(14.7%)으로 뒤를 이었다.
통계적으로 볼 때 현대·기아차의 국내 판매량이 가장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대·기아차가 급발진 사고에 특별히 취약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급발진 사고가 끊이지 않고, 아직까지 원인 규명이 안되고 있는 상황이어서 현대·기아차는 브랜드 이미지 훼손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
<>정책당국과 제조사에 대한 소비자 불만 고조
지금까지 모든 급발진 의심 사고가 운전자 과실로 결론남에 따라, 정책당국과 자동차 제조사에 대한 운전자들의 불만은 하늘을 찌르고 있다.
또한 최근 자신의 벤츠를 골프채로 부순 운전자 사건에서도 보듯이 잦은 차량 고장에도 국내 운전자들은 소비자로서의 권익을 제대로 보장 받지 못하고 있다.
뒤늦게 자동차 ‘사고기록장치(EDR) 공개 법률’과 ‘레몬법’이 시행되거나 시행을 앞두고 있지만, 소비자 불안과 불만을 불식시키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지난해 12월 19일, ‘사고기록장치(EDR) 공개 법률’이 발효됐다. 급발진 추정사고의 원인 규명을 위해 국토부는 급발진 의심사고 민관합동조사반을 구성해 조사해왔지만 원인을 밝히는 데 실패했던 터다.
개정 법률에 따라 현대기·아차 등 자동차 회사가 사고기록 장치를 장착하는 경우에 이를 소비자에게 의무적으로 고지해야 하고, 자동차 소유자 등이 사고기록 장치의 기록내용을 요구할 경우 이를 의무적으로 제공해야 한다.
<>국토부 "개선할 것" 원론적 입장만 고수
그러나 벌써부터 사고기록장치(EDR) 공개가 소비자 권익을 담보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미국의 경우 공개해야 하는 구체적인 항목이 지정돼 있지만 우리나라는 내용이 추상적이고, 데이터 해석장비도 자동차 제조사에 맡겨져 있다는 것.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소비자에게 도움이 안되는 법”이라며 “자동차 제조업체에 급발진 면죄부만 주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박병일 자동차 명장도 최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제조사는 (급발진 문제에 대한 책임을) 피해갈 수 있다고 본다“며 ”EDR로는 운전자가 브레이크를 밟았는지 안밟았는지만 나온다. 꽉 밟은 운전자는 구제할 수 있는데, 방법은 센서 하나만 달면 된다. 그런데 이런 법을 만들 때 전문가 조언을 받는 과정에서 저 같은 사람은 안 부르더라”고 말했다.
EDR이 공개 된다고 하더라도 운전자 입장에서 본인을 증명하고 결백을 입증할 만 한 증거자료가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국토부는 “(문제가 있다면) 제도를 개선해 나갈 것”이라는 원론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제조사 "사회적 비용 증가 우려" 사실상 반대
한 가닥 기대는 이른바 ‘한국형 레몬법’이다. 그나마 입법과정에서 법 취지를 제대로 살릴 수 있을 지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국토부는 무상수리기간 내 주요장치 부품을 4회 이상 수리하거나, 신차 구입 후 1개월 안에 정해진 횟수 이상 결함이 반복되는 경우 등을 교환 환불기준으로 검토하고 있다. 지난해 자동차관리법 개정안을 발의돼 현재 국회 상임위에서 계류중이다.
레몬법은 1975년 미국에서 시행된 소비자 보호법으로 차량 구입 후 18개월이 되기 전 안전관련 고장으로 2회 이상, 일반고장으로 4회 이상 수리를 받게 되면 차를 환불 혹은 교환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그간 국내에서도 공정거래위원회 고시인 ‘소비자 분쟁 해결기준’에 따라 차량 결함에 대한 보상은 받을 수 있었지만 ‘권고사항’이었을 뿐 교환이나 환불 자체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는 정부가 자동차를 국가 전략산업으로 육성해 온데 따른 일종의 ‘후유증’으로 소비자보다는 자동차 제조사의 국제경쟁력 강화에 정책의 무게 중심을 뒀기 때문이는게 중론이다.
현재까지 레몬법의 국회 통과는 불투명하며, 입법이 되더라도 ‘누더기’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자동차 제조사들은 소비자 권익을 보호하자는 입법취지에는 공감한다면서도 ‘정부의 과도한 개입’, ‘사회적 비용 증가’ 등을 이유로 사실상 반대 입장이다.
그러면서 법이 통과되더라도 분쟁조정업무의 일원화, 교환·환불 대상 제한, 자동차제작자의 면책규정 등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소비자 권익보장 중심으로 자동차정책 바꿔야
익명을 요구한 재계 관계자는 “국내 자동차산업 육성과 해외 브랜드들과의 경쟁력 제고를위해 그간 정부가 소비자보다는 차업계에 유리한 정책을 시행해 온 게 사실”이라며 “국산차의 내수 점유율 하락과 해외시장에서의 고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제는 소비자 중심의 정책이 곧 국산차 브랜드의 국제 경쟁력을 강화하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