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정부의 대 테러전쟁이 IT업계의 갈등으로 비화되고 있다. 미국 법무부와 애플이 국가 안보와 사생활 보호라는 양립하기 어려운 난제를 두고 대립하고 있는 가운데, 글로벌 IT기업 CEO들 사이에서 편 가르기 양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발단은 미 연방수사국(FBI)이 지난해 12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장애인 시설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에 심취한 부부가 총기를 난사해 14명이 숨진 테러 사건을 수사하면서부터.
FBI는 이슬람극단주의무장단체(IS) 연계나 공범 여부 등을 수사하기 위해 테러범의 아이폰을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암호 해제에 어려움을 겪자 애플에 협조를 요청했다.
하지만 애플은 소비자 프라이버시권을 명분으로 수사 협조를 거부했고, 미 법무부는 즉각 잠금장치 해제 명령을 내렸지만, 애플은 요지부동. 과연, 이 지난한 과제의 결론은 어떻게 날 것인가
<>팀 쿡, “한번 열린 문은 또 열리기 마련” FBI 협조 거부
지난 16일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는 ‘고객에게 드리는 메시지’를 통해 FBI의 요구가 “개인의 아이폰으로 마음대로 접근할 수 있는 ‘뒷문(backdoor)’을 만들어달라는 얘기다. 이는 ‘마스터 키’까지 요구하는 것”이라며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는 해당 수사에 한 번만 활용하겠다는 FBI 주장은 현실적으로 믿을 수 없으며, 한 번 빗장을 풀어주면 정부가 고객의 개인정보를 마음대로 들여다볼 수 있는 상황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FBI가 반격에 나섰다. 지난 21일 제임스 코미 FBI 국장은 법률 전문 웹사이트 ‘로페어’에 “정부는 수색영장을 받아서 테러범의 휴대전화를 손상하지 않고 사용자 암호를 추측할 기회를 얻으려 할 뿐”이라고 팀 쿡의 우려를 일축했다.
다음 날 팀 쿡은 재 반격에 나서 “법을 준수하는 수억 명의 데이터 안전과 시민의 자유를 위협하는 위험한 선례를 만드는 것”이라며 다시 한 번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현재 애플은 자사 홈페이지에 ‘질의응답(Q&A)’ 코너를 신설하고, 기술·정보·시민·자유 등 분야별 전문가가 참여한 위원회를 구성하자는 제안을 내놓은 상황.
<>애플이 마케팅으로 활용 미 정부의 原罪가 발목
이쯤에서 아이폰의 암호체계가 궁금해진다. 일반적으로 스마트폰은 비밀번호, 패턴 등의 방식으로 사용자가 잠금 기능을 설정할 수 있게 돼 있는데, 아이폰의 경우 비밀번호 입력 과정에서 5번 틀리면 재입력까지 1분, 9번 틀리면 재입력까지 1시간을 기다려야 다시 입력할 수 있는 구조다.
사용자 사전 설정 시 10번째로 비밀번호 입력에 실패하게 되면 모든 데이터가 자동 삭제될 수도 있다. 가능한 암호 조합을 모두 시도하는 데 최장 144년이 걸린다는 결론이다.
여기에서 FBI가 테러와 같은 특수범죄 수사를 목적으로 한 경우, 용의자의 휴대폰 비밀번호 하나 풀지 못할까 의문이 들 수도 있다. 미국도 물론, 그 간 공공연하게 정보기관이 암호 해제를 시도하고 성공에까지 이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난 2013년 전직 미국 국가안보국(NSA) 직원인 에드워드 스노든이 NSA가 테러 대책의 일환으로 정보통신업체들의 협조를 받지 않고 휴대전화나 개인용 컴퓨터를 도·감청해온 사실을 폭로하면서 상황이 미 정부측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
이 사건으로 국가안보와 개인정보 보호의 우선권 문제를 두고 논쟁이 계속되고 있고 이번 FBI와 애플의 날 선 대결이 이 논쟁에 기름을 부은 것이다.
애플이 테러범 수사에 전혀 협조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애플은 상대적으로 접근이 용이한 아이폰 클라우드 백업 자료를 FBI에 제출했다. 그러나 해당 자료에서 증거를 찾지 못한 FBI가 테러범의 개인 아이폰 단말기를 수사하기 위해 암호 해제 프로그램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 지경에 이른 것.
일각에서 애플이 자사의 보안기술 과시를 위해 수사에 협조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으나 분명한 건, FBI도 뚫을 수 없는 완벽한 잠금 장치를 보유한 애플의 보안 기술력만은 인정받게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구글·페이스북·MS CEO "네 편이요“ 커밍아웃
한편, 전세계 IT 거물들도 이번 사안에 찬반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명하고 있어 흥미를 더하고 있다.
먼저 구글의 순다르 피차이 CEO는 애플을 옹호하고 나섰다. 그는 자신의 트위터에 “기업들에 해킹을 강요하는 것은 이용자들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페이스북 CEO인 마크 저커버그 역시 모바일 월드 콩그레스(MWC) 강연에서 “‘뒷문(back door)’을 요구하는 것은 보안을 향상시키는 효과적인 길도 아니고 옳은 일도 아니”라며 애플을 지지하고 나섰다.
유럽연합(EU)의 안드루스 안시프 '디지털 단일 시장' 담당 집행위원 겸 부위원장도 유럽 전문 매체 유랙티브와의 인터뷰에서 "무엇이 됐든 암호 시스템에 뒷문을 만드는 일에 강력 반대한다"고 밝혔다.
반면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이며, IT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인 빌 게이츠는 FBI 편을 들었다. 그는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정부는 범죄 중단, 테러 위협 조사 등을 할 수 있는데 이는 정보에 접근해야만 비로소 가능하다”며 FBI 편에 섰다. MS 대변인이 FBI에 협조하라는 법원 명령에 반대한다고 발표한 것과 배치되는 발언이어서 더욱 화제를 모으고 있다.
<>프라이버시 vs 국가안전보장, 당신의 생각은
그렇다면 일반 시민들의 생각은 어떨까 미국의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가 지난 18~23일까지 미국 성인남녀 100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잠금 장치 해제에 ‘찬성’이 51%, ‘반대’가 38%로 나타났다. 18~29세 응답자의 47%, 65세 이상 응답자의 54%가 FBI 수사에 협조하라고 답변했다.
“디지털 세계에서 한 번 개발된 기술은 계속해서 어떤 기기에서도 쓰일 수 있다. 이를 막는 유일한 방법은 절대 그걸 만들지 않는 것이다”라는 애플의 공식 의견처럼 보안전문가들은 복제가 용이한 소프트웨어 특성상, 잠금 해제 소프트웨어를 한 번만 사용하겠다는 FBI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말한다.
미국 정부가 그 동안 마약 밀수, 포르노 등의 일반 범죄에 역시 애플에 같은 요구를 해왔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911 테러를 겪은 미국인들에게 ‘테러 트라우마’는 분명 우리의 그것과는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도 1990년대 후반 국정원과 정통부가 ‘암호이용촉진법’ 제정을 시도하다가 무산된 바 있다. 때마침() 정부여당이 테러방지법 제정을 추진하면서 국민들의 시선이 정치권으로 쏠리고 있다. 야당은 일부 독소조항이 국정원에 무소불위의 권한을 줄 수 있다며 반대하고 있다.
애플과 FBI의 갈등이 소송전으로 장기화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암호 해제 공방이 어떻게 결론이 날지 더욱 궁금해지는 이유다.
법의 존재 이유는 국민들에 대한 국가 개입의 최소한이다. 그러나 법은 또한 국가안전보장을 위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어떤 가치를 상위법에 올려놓을 지는 유권자이자 소비자인 독자 여러분들의 몫이다. 당신은 선택은